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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권
김동명문학관
강릉이 낳은 근현대시인 김동명을 위한 문학관
소개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에 있는 시인 김동명의 문학관은강릉에는 문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여 다양한 문학 활동을 하는 데 다소 제약이 되었으나, 김동명 문학관이 개관함으로써 문인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는 데 유용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관광가이드
김동명은 전원적인 서정과 민족적인 비애를 시화한 시인으로 강릉의 현대 문학에 지평을 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에 강릉이 낳은 한국 근현대의 대표 문인인 초허 김동명[1900~1968]의 삶을 재조명하고, 그의 문학 정신을 계승하며 지역 문예 진흥에 이바지하기 위해 2013년 7월 3일 김동명 문학관을 개관하였다. 부지 면적은 8,656㎡, 건축 면적은 235.39㎡로 생가 한 채와 전시관 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가는 방 4칸과 부엌 1개가 있고, 전시관은 전시실 1칸, 세미나실 1칸으로 되어 있다.
관광팁
전시실에는 김동명 시인이 가지고 있던 책을 중심으로 김동명의 서재를 재현해 놓았다. 시집, 정치 평론, 수필집, 또 생애를 알 수 있는 연보, 문학 활동의 내역, 그가 발간한 각종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미나실에서는 각종 문학 행사와 동시화 전시, 시 낭송회, 백일장, 문인들의 월례회 또는 발표회, 가곡의 밤, 작은 시설 문화프로그램 등을 진행한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김동명 문학관에서는 각종 문학 단체에서 주관하는 문학회 정기 모임 및 문학 행사, 문인 협회 주최 백일장, 북콘서트, 가곡의 밤 등 문화 행사, 시화 일러스트의 교육 프로그램, 그리고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영화 상영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가난한 농민의 외아들로 태어난 김동명의 중심에는 김동명의 어머니가 있었다. 동명이 원산으로 이사 가기 전,사기막리 외가(갈미봉)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마침 서당에서 열린 시회에서 동명의 시가 장원에 뽑혀 온 동에가 들썩였어도 칭찬 한마디 없이 인색했다고 한다.아들이 자만심에 빠질까 봐 우려한 어머니의 큰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어머니는 아들이 강릉 군수가 되어 한께 고향으로 되돌아가길 바랐고, 신문학을 배우기 위해 떠나온 고향이지만 세파에 시달리고 서러우니 몸서리치게 생각나는 건 나고 자란 그곳, 고향 땅 강릉 뿐이었을 것이다.김동명문학관에 가면 가난했지만 가련하지 않았던 시인,김동명 이제 그가 기나긴 침묵의 시간을 지나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사천에 왔다면 주변관광지와 맛있는 먹거리를 먹어보고 가길 추천한다. 인근에 있는 사천항과 사천해변은 작은 어항이지만 아름답고 ,스킨스쿠버 하는 사람들로 인기 있은 해변이다.사람들이 사천항을 찾는 또 하나는 바로 물회와 미역국이 유명하고 맛있다. 물회는 오징어, 멍개, 해삼, 세꼬시 등 다양한 해산물을 넣고 각종 채소와 초고추장을 넣고 말아 먹는 것인데 새콤하고 달콤한 맛이 별미이다.
#시인#김동명#문인#문학관#전시실#문화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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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권
강릉초당동유적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선사유물지
소개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신라 통일전쟁기 전후의 고분군 유적이다.
관광가이드
강릉 해변의 초당동 일대에 산재되어 있으며, 그 중 1기가 1969년의 정지작업 중 발견되어 긴급 조사되었다. 강릉 초당동 일대는 발굴조사 및 지표조사를 통하여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 삼국시대에 이르는 주거지와 고분유적이 함께 분포하는 복합유적으로 확인되었다. (1993년 이후 강릉대학교 박물관,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약 27차례에 걸쳐 발굴 및 시굴조사)
관광팁
2007년 12월 3일 국가유산으로 59,290㎡ 에 이르는 유적이다. 중요한 매장유산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는 지역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삼국시대에 이르는 주거 유적 및 고분 유적이 함께 분포하고 있다.초당동의 주택부지에서 발견된 신라시대의 대형 수혈식 석곽묘(竪穴式石槨墓)에서는 금동제 호접형 관모장식, 은제 허리띠 장식, 마구류, 철검, 철촉 등이 출토되었다.이 외에 초당동 주변의 하시동 등지에서 발견된 같은 형태의 돌방무덤에서는 굽다리접시, 귀달린 사발, 철칼, 청동 말방울, 금동관, 환두대도 등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들이 상당수 출토되었다. 또 근처에 있는 안인리에서 삼국시대 전기의 대형취락이 발견된 예로 보아 이 지역은 일찍이 실직국(悉直國)과 같은 독자적인 집단이 형성되어오다가, 후일 신라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유적은 삼국시대 때 이 지역에 토착세력이 있었다는 사실 및 당시 강릉 지역의 지정학적 위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구조는 동서를 장축으로 하는 장방형의 돌방무덤[石室墳]이다. 동벽은 파괴되어 동서의 장축길이는 알 수 없었으나 남은 부분의 길이는 4.5m였다. 너비는 바닥이 넓고(1.4m) 천장이 좁은(97㎝)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었다. 평면도 전체적으로 보면 동쪽이 넓고 서쪽이 좁은 사다리꼴이었다.발굴 당시에는 길이 2.15m, 너비 1.3m, 두께 30㎝의 화강암으로 된 한 개의 뚜껑돌[蓋石]만이 원래의 위치에 남아 있었다. 바닥은 사람 주먹만한 자갈을 한 벌 깔았고 그 사이는 모래로 채웠다. 유물은 주로 돌방 안의 서쪽에서 토기·철제무기·말갖춤[馬具] 등이 발견되었다. 입구나 널길의 흔적은 없었다.이곳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아 온 곳으로 선사시대부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 삼국시대에 이르는 주거지와 고분들이 분포하는 곳으로 신라시대 고분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 고분에서는 금동제 나비모양 관모장식, 은제 허리띠 장식, 등이 발견된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지이다.특히 2005년 5월∼6월에 강원특별자치도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초당동 84-2번지 주택신축부지에서 확인된 신라시대 수혈식 석곽묘는 주·부곽이 달린 독특한 장법의 대형분으로 금동제 호접형 관모장식, 은제 허리띠 장식, 마구류, 철검, 철촉 등이 출토되었으며 이는 삼국시대 당시 강릉지역의 토착세력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귀중한 유물로서 삼국시대 동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한 영동지역과 신라와의 관계 등 강릉지역의 지정학적 위상과 관련하여 학술적·문화재적 연구에 가치가 있다. 유적의 보호 차원에서 팬스가 가로막혀 가까운 접근은 어려워도, 출토되어 있던 부분을 커다란 돌로 덮어 놓아 유물이 출토된 곳을 확인할 수 있다.그리고 한 쪽에는 어르신들과 마을 주민이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이 마련되어, 다소 조심스러운 유적을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 세심함이 엿 보인다.초당동 유적지에서 역사의 향취도 느껴보고, 초당동의 명물인 초당 순두부와 짬뽕순두부,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도 둘러보면 의미 있는 문화유산답사가 될 것이다.
#신라#해변#고분유적#발굴#사적#철검#고분#석곽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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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권
허균시비
강릉의 대표 문인 허균과 허난설헌의 예술혼을 기리는 시비
소개
강릉이 낳은 대표적인 문인으로서 허균과 허난설헌을 비롯한 허 씨 5문장의 예술혼을 기리는 시비 5기가 허균의 생가터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세워져 있다. 문학 산책로로 조성된 지역 중의 하나다. 허균은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로 유명하다. 1569년 사천 애일당에서 태어났으며 허성, 허봉 등 두 명의 형과 누나 허난설헌을 뒀다. 아버지를 비롯한 형제들은 허씨 오 문장가로 불리게 되며 오문장가가 남긴 시문은 무료 5천여 수에 달한다.
관광가이드
산세가 흡사 이무기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산 이름을 교산이라고 불렀으며, 허균은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고 스스로 지어 불렀다고 한다. 허균의 시비를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숲과 대숲은 허균의 파란만장한 삶을 모두 지켜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비 앞에서 허균을 떠올리고 있으면 대숲이 허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마음이 숙연해질 것이다.
관광팁
애일당이 있었던 곳으로 교산 허균이 태어난 집은 정확히 알 수 없고 추정되는 곳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경포 해변에서 사천 솔숲을 지나 사천 항구 쪽으로 들어가지 말고 그대로 직진하다 보면 푯말이 보인다. 왼쪽 얕은 언덕길로 올라오면 이정표를 볼 수 있고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좌회전해서 언덕길을 내려오면 허균 시비가 보인다. 사천 바닷가에는 허균이 어릴 적 뛰어놀았다는 교문암이 있고 교문암 바로 위쪽에는 뒷섬이 있다. 허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초당에 있는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에 가면 자세한 허균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접할 수 있다.
#허균#시비#문학#홍길동전#애일당#교산#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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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권
매월당김시습기념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의 저자
소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의 저자이자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의 정신을 계승하고 시와 소설에 담긴 김시습의 고매한 얼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다.
관광가이드
김시습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현실 비판 인식을 판타지로 승화시킨 5편의 작품을 묶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한 단종 폐위에 반대하는 생육신 중 한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김시습의 얼과 문학사상을 선양하기 위하여 2007년 6월 15일 김시습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부지 면적은 3,117㎡, 건축 면적은 358㎡로 전시관 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관은 전시실 1칸, 저포놀이 체험방 1칸, 애니메이션방 1칸, 포토존방 1칸으로 되어 있다.
관광팁
강릉은 김시습의 관향(貫鄕)이자 어머니의 시묘살이를 했던 곳으로 유랑시절의 거점이였다. 그는 격식 없는 자유로운 시와 글을 썼던 문인이자 불교의 철학과 유교이상을 결합하려고 고심한 철학자, 몸과 생명을 중시하는 수련도교를 실천한 사상가,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동정한 인도주의자,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전통미를 찬미한 여행가였다. 또한 시대와 불화했던 지식인이었으나 고결한 인품과 굳센 지조는 후세에 길이 존경받았다. 이러한 김시습의 빛나는 문학과 얼을 계승하고자 기념관을 세워 선양하고 있으며 각 전시실에는 그의 대표적인 한시 동봉육가 영상자료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실이 있으며, 금오신화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방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인 「금오신화」 중「만복사저포기」에 등장하는 전통민속놀이 “저포놀이”를 배워 볼 수도 있다.
#한문#소설#매월당#김시습#한문소설#문학#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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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권
대관령 산신각
대관령 국사서낭(성황)을 모신 신당
소개
대관령 산신각 대관령 성황당 동쪽 약 30m 거리에 있는 사당으로 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판에는 대관령국사성황사라고 쓰여 있는데, 사당은 건평 5평 정도의 기와집이며, 내부 정면 벽에는 국사서낭 신상이 걸려 있다. 신상에는 백마를 타고 궁시를 메고 있는 서낭신과 말고삐를 잡고 있는 시종, 그리고 그 앞뒤에 호랑이가 호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대관령국사성황대신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관광가이드
당 앞에는 서낭의 심부름을 하는 하위신인 ‘수비’를 모시는 수비당 또는 수구당이라고 불리는 돌상이 있다. 현재의 당우는 1944년에 중건된 것인데, 그 역사는 확실하지 않으나, 적어도 천 년 이상 된 강릉단오제의 유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관령국사서낭은 대관령산신과 강릉단오제의 주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는 지은 지 40∼50년밖에 되지 않은 것 같으나, 『임영지(臨瀛誌)』와 『동국여지승람』 등에 전하는 대령산신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 그 역사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 모시고 있는 산신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조선조 광해군 때 허균의 시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藁)』에 김유신(金庾信)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주민들도 그렇게 믿고 있다. 건물은 한 평 남짓한 작은 골기와 맞배지붕의 당으로서 현판에 산신당이라고 쓰여 있다.
관광팁
대관령 산신당에 있던 국사서낭과 여서낭은 5월 3일까지 함께 있다가, 5월 4일부터 5월 6일 마지막 절차로서 제사상에 있던 신간과 호개등, 지화 등을 태우는 의식인 소제 때까지의 남대천 단오제장으로 옮겨졌다가, 소제가 끝난 다음 다시 국사서낭은 대관령 국사 성황사로, 여서낭은 대관령 국사 여성황사로 각각 돌아가게 된다.
#단오제장#대령산신#대관령산신#강릉단오제#기념물#성황당#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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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권
대공산성
백제의 시조 온조가 군병을 훈련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전해짐
소개
대공 산성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위치한 둘레 약 3,000m의 성벽이다. 현재 동문·서문·북문 터와 부분적으로 성벽이 남아 있다. 일명 ‘보현산성(普賢山城)’ 또는 ‘대궁산성(大弓山城)’이라고도 하는데, 축성연대는 미상이다.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가 군병을 훈련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전하는데, 한편으로는 발해의 대 씨(大氏)가 쌓아서 대공 산성이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관광가이드
대공 산성은 1979년 5월 30일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자연석을 허튼 층 쌓기로 축성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성벽이 많이 허물어져 부분적으로 대개 2m 정도의 석축 흔적과 동·서·북쪽에 성문 흔적만 남아 있다. 이곳은 1894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을미의병 항쟁 때 민용호(閔龍鎬)가 이끄는 의병들이 일본군 경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으로도 유명해 의병들의 애국심을 되새겨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관광팁
보현사 입구 못미처 오른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오르면 대공 산성이 있다. 약 4㎞의 석축 산성이다. 백제 시조 온조왕 또는 발해 왕족인 대 씨가 쌓았다는 전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기록에는 이곳을 보현 산성이라고 적고 있다. 고종 32년(1895) 을미의병 때 민용호가 이끄는 의병이 이곳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북쪽의 성벽은 험준한 절벽 지형을 이용해 쌓았는데 거의 무너져 있고, 남쪽에는 다듬지 않은 돌로 쌓은 높이 2m 정도의 성벽이 있으며, 동·서·북쪽에 문 터가 조금 남아 있다. 성안에는 약 1,000년 전에 쌓았다는 우물터가 있다.
#기념물#온조왕#산길#을미의병#산성#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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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권
굴산사지당간지주
화강석으로 만든 통일신라 시대의 지주
소개
거대한 한 덩이의 돌을 사용한 한국에서 가장 큰 당간지주이다. 현재 하부가 묻혀서 당간을 세워 놓았던 기대석(基臺石) 등 하부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4면에는 아무 장식이 없는 평면이며, 하부는 돌을 다듬을 때 생겨나는 잡다한 선조(線彫)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서로 마주 보는 내면과 외 측면이 수직을 이루며, 앞뒤 양면은 상부까지 수직이나, 위 끝에 이르면 머리 부분을 양측에서 점차 둥글게 깎아 곡선을 이루며, 정상은 뾰족하지만, 남쪽의 지주 첨단(尖端)이 약간 파손되었다.
관광가이드
굴산사지당간지주는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범일국사가 창건한 굴건사의 유물이다. 높이는 5.4m이다. 당간을 고정하는 간은 상·하 두 곳에 있으며, 상부는 상단 가까이에 둥근 구멍[圓孔]을 만들어 간을 시설하였고, 하부는 3분의 1쯤 되는 곳에 구멍을 뚫어 간을 끼우게 하였다. 규모가 거대하며 그에 알맞게 소박하고 강경한 수법을 보여 눈길을 끈다.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다운 웅대한 조형미를 엿볼 수 있다.
관광팁
굴산사지당간지주는 구정면 학산리 마을 근처의 논에 둘러싸인 평지에 있다. 내비게이션으로 찾아갈 때 과연 이곳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조금만 가다 보면 굴산사지 당간지주라는 표지판을 찾아볼 수 있다. 앞에 도착하고 보면 엄청난 규모에 놀라게 될 것이다. 높이도 높이지만 당간지주의 두께가 특히나 두껍고 커서 웅장한 아름다움에 압도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국가유산으로, 웅장함이 느껴진다
#당간#보물#범일국사#굴건사#통일신라#굴산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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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권
보광리석조여래좌상
대좌와 광배를 갖춘 석조여래좌상
소개
보광리 석조여래좌상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있는 높이 1.7m의 석불이다. 1992년 6월 10일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대좌와 광배를 갖춘 석조여래좌상이며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옛 절터에 있다. 토지 소유자인 이순선에 의하면 약 50여 년 전 이 지역에 보광사(普光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말의 것으로 추정된다.
관광가이드
보광리 석조여래좌상은 전체적으로 정교하고 문양이 우수해 눈길을 끈다. 화강암으로 원형이 잘 유지되어 있으나 광배 윗부분이 약간 파손되었다. 나발(螺髮)은 마멸된 곳이 많고 육계(살상투)가 크며 두 귀는 긴 편이다. 결가부좌를 하였고, 법의(法衣)는 주름이 선명한 우견편단(右絹偏袒)을 걸쳤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다.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안 지역에는 3단 대좌를 갖춘 불상의 현존 예가 드물어 양양 서림리 사지 석불과 함께 3단 대좌를 전형적으로 갖춘 불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관광팁
보주형(寶珠形)의 광배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으로 구별되고, 그 사이는 보상화문(寶相華文)으로 장식되어 있다. 가장자리는 화염무늬〔火焰文〕로 장식되었고, 뒷면에는 명문(銘文)의 흔적이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알아볼 수 없다. 대좌는 하대 하반부가 매몰되었다. 중대석은 8각으로, 각 면에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다. 상대석은 아랫면에 2단의 받침이 있다. 상대석과 하대석은 연꽃잎으로 장식되어 있다.
#보광리#석조여래좌상#대좌#광배#사찰#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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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권
구산서낭당
국사 성황신을 처음 모시는 유형 전승 시설물
소개
구산 서낭당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성산면에 있는 유적이다. 매년 음력 4월 15일 대관령 국사 성황제를 마치고 국사 성황 행차가 대관령 국사 여성황사로 가기 전 잠시 머물러 굿을 하고 제례를 하는 곳이다.
관광가이드
구산 서낭당은 약 300여 년 전부터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당집은 약 10여 년 전에 새로 건립되었고 주위에는 돌담이 둘러쳐 있다. 구산서낭당의 특징은 다른 서낭당에 있는 성황지신, 토지 시신, 여역지신 외에 영산 지신이 있다는 것이다. 영산 지신이 있는 이유는 앞산이 영신재인데 개발로 인해 영산 신에 갈 곳이 없어 함께 하게 되었다고 한다.
관광팁
구산 서낭당은 주변 공간이 좁고 진입로가 없어 구산 서낭제를 지낼 때마다 큰 불편을 겪어왔다. 이에 강릉시는 구산서낭당 주변의 토지 1,213㎡를 매입, 공원과 주차공간을 조성해 단오제 전승 기반을 갖추는 한편 단오 관련 유적지를 활용한 관광객 유치 등 연중 단오제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이로 인해 구산 서낭당은 사계절 관람객이 편리하게 방문해 단오제를 즐기고 있으며 지역관광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서낭당#구산#성황제#서낭제#단오제#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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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권
관음리 오층석탑
고려 시대 안국사라는 사찰에 있던 석탑
소개
관음리 오층석탑은 강릉시 성산면에 있는 석탑으로 1992년 6월 10일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중기단 위에 네모 반듯한 5층의 탑을 올린 고려 시대의 석탑이며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옥개(屋蓋)의 모서리가 일부 파손되기는 했지만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지대석(地臺石)은 여러 장의 장대석(長臺石)으로 짜여 있고, 하층기단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하대중석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3구(軀)씩 새겨져 있으며, 하대갑석의 윗면에는 2단의 받침을 두어 상층기단을 받들고 있다. 상대중석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모서리기둥)와 1주(柱)의 탱주(撑柱:버팀기둥)가 있다. 상대갑석은 아랫면에 비스듬한 부연(副緣)을 두고 윗면에는 2단의 받침을 두어 1층 옥신(屋身:몸돌)을 받들고 있다.
관광가이드
강릉시 성산면 관음리를 찾아가면 옛 절터에 건립된 높이 약 3.3m의 석탑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석탑은 이곳에 있던 절 이름을 확실하게 알 수 없어 동리의 이름을 붙여 관음리 오층석탑이라고 부른다. 몇 가지 기록에 따르면 안국사라는 절 이름이 보여 이 일대를 안국사지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건물지의 축대와 주초석이 노출되어 있고 장대석들도 많이 남아 있어 옛 절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관리되지 않은 오랜 세월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온 탑과 함께 시간 여행을 떠나볼 수 있다.
관광팁
관음리 오층석탑을 만나러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정확하지 않은 위치와 관리되지 않은 주변 환경으로 인해 풀숲이 무성하게 우거지는 여름철에 가까울수록 탑을 쉽게 찾는 것이 어렵다. 인근에 있는 마치 민가처럼 보이는 절집의 뒤쪽으로 이동하면 만나볼 수 있다. 숲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 주민들이 그 위치를 잘 알고 있어 질문할 수 있다면 무리 없이 찾아갈 수 있다.
#세월#안국사지#고려#석탑#오층석탑#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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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권
대창리당간지주
양변에 장식 수법으로 모[角]를 죽였으며 화강 석재로 만들어진 통일신라 시대의 당간지주
소개
1963년 1월 21일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높이 5.1m. 화강 석재.2개의 지주가 원래의 위치와 형상대로 1m의 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마주 보고 있다. 이 주변에서 간혹 기왓조각 등이 수집되어 일대가 절터임을 알 수 있으나 전하는 사적은 없다. 마주 보는 내면과 외면, 전·후면에 아무런 조각장식이 없으나, 외면의 양변은 모[角]를 죽인 약간의 장식수법이 보인다.
관광가이드
현재 당간을 받치던 대석과 기단부의 돌이 없어졌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기저부에 직사각형의 지대석을 구축한 점으로 보아 기단부도 직사각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내면의 간구 이외에는 아무런 조각장식이 없는 간결한 양식이라든지 소박하고 견실한 전체의 수법이 망덕사지 당간지주(望德寺址幢竿支柱:보물 69)와 거의 같아 조성 연대도 이와 비슷한 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관광팁
대창리 당간지주는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으며 1m의 간격을 두고 두 지주가 남북으로 마주 보고 서 있다. 지주 사이의 깃대를 받치던 받침이나 기단부가 남아 있지 않아 원래의 모습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바닥 부분에 직사각형의 돌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기단부 또한 직사각형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으로 조각한 흔적이 없는 소박하고 간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깃대#당간지주#8세기경#망덕사지#당간#모[角]#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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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권
신복사지
범일 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신복 사의 절터
소개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내곡동에 있는 신복 사지는 통일신라 때 범일 국사가 창건한 신복 사의 절터이다. 건물터들의 배치 양식과 남아있는 보살상의 양식을 통해 고려 초기의 양식으로 추정되며 당시 강원특별자치도 영동 지방에서 유행하던 양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지이다. 절터에는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와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이 남아있다.
관광가이드
삼면이 키 큰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크지 않은 절터 안에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3층 석탑과 보살상이 있다. 절은 사라지고 남아있는 옛 절터에서 천년의 세월 동안 변함없이 한 곳만 바라보며 자리를 지켜온 보살상을 보고 있으면 경건함과 함께 어떻게 사라졌을지 모를 신복 사에 대한 아쉬운 감정이 떠오른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탑과 보살상이 만들어지던 때로 시간여행을 떠나보는 것을 권한다.
관광팁
신복사지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강릉 시내에서 내곡동의 관동대학교 방향으로 가다 강릉시 보건소에 못미쳐 좌측으로 진입하는 작은 길로 들어선다. 이 소로를 따라가다 보면 곡간 사이에 삼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이 있으며, 주변 일대가 신복사지이다. 수많은 옛 절터들이 있지만 신복 사지의 3층 석탑과 보살상은 꽤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이 그대로 남아있어 그 당시 유행하던 양식을 알 수 있다. 미리 시대별 보살상과 탑의 양식을 공부하고 조상들의 예술적 감각을 감상한다면 더욱 의미가 깊은 신복사지 관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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